2020년 3월 19일
우리는 믿음 혹은 신앙을 같은 개념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 부분을 언어적인 측면에서 보면 서너 가지 세부 개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신념(belief)이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내가 믿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신념이라든지 종교적 신념이라는 표현이 주는 느낌입니다. 여러 요소 중에서 인간의 지성적 측면이 많이 작동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지식을 종합해 본 바에 의해서 나는 이렇게 살기로 했다는 결심의 측면입니다.
신앙의 두 번째 측면은 신뢰(trust)입니다. 이런 신앙에는 지식적인 신뢰도 담겨 있고, 정서적인 요소도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신적인 영향력을 기억하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대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 제공되고 먼저 이런 경험을 한 신앙의 선배를 통해 그리고 전통을 통해 전수됩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많은 종교에서는 이런 신적 기대감이 담겨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적 지식은 한계 상황을 경험하는 '나'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인지하게 된 후에 절대자를 의존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뢰의 차원에서의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적 측면이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감성적인 측면이 많이 작동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 점검해 볼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은 실천(doing)의 영역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완성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특별한 활동을 요청합니다. 주일 성수와 헌금이라는 신앙의 활동, 봉사와 섬김 그리고 선교라고 하는 신앙활동, 높은 도덕적 삶에 대한 부담감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혹은 성경적으로도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나타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앙관과 야고보서에서 제기된 행함으로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 늘 충돌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충분히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일 성수라든지 십일조 등의 헌금을 하는 행위는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인가요 아니면 기독교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신앙활동인가요?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을까요? 주일성수를 하지 않고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헌금은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가요? 아니면 주님의 것을 도둑질해서 벌받을까봐 두려워서 하는 행동인가요? 아니면 십일조와 여러 헌금을 드리고 더 많은 복을 기대하고 있는걸까요?
행동은 지식이나 이성에 근거한 활동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정서적인 기쁨과 두려움에 근거한 활동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활동은 이성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감정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배는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드리는 것입니까? '예배한다'라는 말로 충분할까요 아니면 불충분할까요? 일요일에 한 번 큰 모임으로 모이는 예배면 충분한가요? 아니면 저녁예배를 드러야 할까요? 새벽기도회와 새벽예배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수요일에 한 번 더 모여서 예배하는 것과 금요일에 모여서 늦게까지 예배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함께 모여서 예배하지 않고 혼자 예배하는 것은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신약성경"을 읽어보신 분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배하는 모습이 언제 등장하는지 아실 겁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예배하거나 기도회를 많이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바울서신에 볼 때, 한 날을 다른 날보다 소중히 여길 수도 있고, 모든 날을 소중히 여길 수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지식과 감정적인 측면에서 어떤 것이 더 많이 작동하고 있습니까? 매일매일을 소중히 여기는 삶은 지성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을 얼만큼 배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적 행동이 두려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때 참된 신앙활동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반면에 내가 거룩한 삶을 영위하지 못할 때 엄위로우신(awesome)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회개와 겸손함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행동에 감정적인 부분이 담겨 있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활동은 기계적인 것이 됩니다. 말씀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적인 행동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무미건조한 행동이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이 감정적인 측면이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됩니다. 감정적 혹은 열정적인 신앙활동은 기독교 지식에 대한 이성적인 깨달음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깊은 울림을 동반하게 됩니다. 에스라서에 나오는 말씀을 읽기만 했는데도 흐느껴 우는 감동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늘 흐느껴 울며 감동에 취해 있는 신앙은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눈물을 닦고 두 발로 굳게 서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생각하고 그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구원을 받거나 복을 더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믿는 순간 구원을 받은 존재가 됩니다. 행동은 구원의 확신에 따른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불편하거나 지나치게 익숙해져서 더 이상의 감동이 없다면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에 이 세 가지 측면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성적 측면, 감성적 측면, 실행적 측면에서 우리는 점점 발전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퇴보하고 있다면 그것을 진단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바로 감성적 측면입니다. 예전처럼 눈물이 나지 않거나 마음에 뜨거운 어떤 것이 생기지 않으면 우리는 매너리즘에 빠졌거나 절망하는 신앙이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24장에 나오는 엠마오 마을로 돌아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지만, 말씀을 새롭게 배운 후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포기했던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뜨거운 마음이 작동해서 움직이고 있는 신앙인인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