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8일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이성과 신앙을 구분하여 신앙을 이성보다 우위에 두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라(행 17:11)는 질문을 종종 생략하거나 보지 않고 믿는 것(요 20:29)이 더 복을 받는다는 고백을 더 많이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적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이성에 관한 획기적인 깨달음은 '계몽주의' 시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성에 대한 관심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도 등장하고 있으며, 초대교회와 교부시대의 믿음의 선배들의 활동을 기독교적 변증이라고 부르는 면에서 발견할 수 있고,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과 그중에서도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활동에서 신앙의 이성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중세후기의 교회가 비이성적인 신비주의를 강요하는 것에 대한 이성적인 성찰(성경연구)을 통해 깨달은 것을 선포하면서 이루어진 것이고, 장 칼뱅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장로교는 '이성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기독교파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성을 넘어서는 신앙으로 강조되는 것은 어쩌면 "정서적 신앙" 혹은 "감성적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감성적 신앙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우리의 감정이나 이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순간부터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위에 있는 그림처럼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성을 강조하는 신앙이다. 객관적인 진실 혹은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믿음으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감정이 힘을 내서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부분적으로 위 그림에서 다른 관점을 찾는다면, 사실은 "기관사"와 같고 믿음은 "엔진"과 같으며, 감정이 "연료" 혹은 에너지라고 보고 싶다. 그리고 사실에 입각해서 믿음의 방향을 찾게 되고 그 방향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는 것이 기도교 신앙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은 방향을 찾는 "소스"이고 이성은 "기관사"이며, 믿음은 우리의 영적 엔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성에 관한 연구를 한 학자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벨렝키"라는 학자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Women's ways of Knowing"이라는 훌륭한 연구를 통해 우리에게 지식과 권위(authority)라는 관계성을 발견하게 해 준다. 침묵, 주어진 지식, 경험적 지식, 절차적 지식, 포용적 지식의 단계를 거치기도 하고, 특정 단계에 고착되는 현상을 제시한 이 연구는 여성들에 대한 분석이지만, 남녀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연령과 관련된 부분에서이다. 그리고 특정 단계에 고착될 수 있다는 시사점이다.
1) 침묵의 단계는 우리가 어떤 질문에 대하여 자신감이 없을 때 취하는 행동양식이다. 주로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지만, 어떤 경우는 몰라서라기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자신감이 없거나 혹은 근거가 빈약할 때 행하는 방식이다. 이 상태로 노년기까지 가는 여성들이 있다고 벨렝키는 이야기한다.
2) 주어진 지식에 의존하는 단계의 사람들이 있다. 나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의 권위가 외부에 있는 경우이다. 아버지 혹은 남편이나 아들, 또는 뉴스, 카톡, 유튜브에서 제공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은 진실 혹은 진리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이 경우에 그 권위에 대한 의심이 들지 않을 때까지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이단 집단에서 자주 발생하는 현상이지만 교회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목사님이 설교를 통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잘못된 지식과 정보가 제공되더라도 수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목사님이 정정하는 설교를 하더라도 과거의 정보에 매여서 현재의 목사님보다는 과거의 목사님을 더 추종하기도 한다.
3) 주관적 지식(혹은 경험적 지식)의 단계의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진실되고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경험에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딱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람마다 경험이 다양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들이 모여서 통념이 되고, 심각한 편견이 될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이다. 특정 지역사람에 대한 평가는 종종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편향된 견해도 개인의 경험과 주변의 영향에 대한 내적 확신으로 고착화될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불변의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4) 네번째 단계는 배운 사람들의 수준인 "절차적 지식"의 단계이다. 요즘 유행하는 "팩트체크" 혹은 "사실확인"의 단계를 거쳐서 얻게 된 지식을 의미한다. 학문적인 과정에서 가설과 실험, 검증을 통해 확인된 지식이다. 이런 전문적인 지식도 특정한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단서가 붙기도 한다. 절대적인 지식이 발견될 수도 있지만, 각각의 학문들의 방법론에 기대어서 연구되고 정리된 것들이다. 문학적인 지식과 천문학적인 지식은 상호 이용될 수 있지만 같은 것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수학적인 지식과 물리학적인 지식은 유사하지만 이 역시 같다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이런 절차적 지식 훈련이 대부분의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제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이런 절차적 지식을 다루며 살지는 않는다.
5) 마지막 단계는 이런 각각의 지식 단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절차적 지식이 가장 객관적인 지식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그리고 우리 개인이 객관적인 존재로만 살아가지는 않는다. 객관적으로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 지라도 우리는 각각의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아마도 "관용" 혹은 tolerance, 똘레랑스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는 보편적으로 나이가 많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겠지만, 훈련으로도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 본다.
결론적으로 기독교인은 이성적인 신앙을 하는가라는 주제로 돌아가볼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비"의 경험을 추구한다.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가지는 특징이 바로 신비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왜 하늘과 땅을 지으셨는가?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은 왜 내가 태어나도록 하셨는가?
이런 질문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간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단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쪽으로 신앙이 성장하거나 성숙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전환이 덜 이루어진 수준에 머무를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해 드린다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자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시겠지만, 꼭 나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리고 하나님을 내 손아귀에 쥐어보려고도 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신앙은 감성적이어야 하고, 이성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질문해 보아야 한다. 내가 가진 기독교적 신앙과 지식은 누구로부터 온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정확한가? 그리고 나의 기독교적 지식을 근거로 한 나의 신앙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포용하고 있는가? 내가 배척하는 사람들은 어떤 존재들이며, 미처 내가 관심도 갖지 않았던 사람이나 자연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답을 찾아가다보면 왜 우리 기독교인들이 대화를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