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전래된 기독교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획기적인 사건을 통하여 그 즈음에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17세기 초, 그러니까 1600년대 초반에 가톨릭(Catholic Church, 천주교) 신앙이 "서학"이라는 방식으로 자생적으로 전래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의 선교사였던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수입하여 읽는 것을 포함하여 서양의 과학, 수학, 철학, 음악, 지리학 등의 형태와 함께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다. 이런 영향력의 일등공신은 "예수회"였습니다. 유럽을 넘어서는 기독교 선교는 천주교회의 예수회를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에 개신교 선교가 같이 진행됩니다.
1832년에 독일의 선교사 귀츨라프가 첫 방문을 시작으로 1866년에 토마스 선교사, 1884년에 알렌, 1885년에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이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왔습니다. 기독교 전래에 대한 과장된 이야기들도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중기의 기독교회나 조선후기의 기독교회는 모두 탄압을 받았고 수많은 신앙인의 순교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기독교는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문화 운동의 차원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실학사상에 영향을 준 기독교적 서학이 존재하였기에 정약용이라든가 김대건이라는 이름 존재하게 됩니다. 일본의 국권 침탈의 시기와 겹치게 되는 개화기 개신교의 선교는 학교를 세우고, 미신을 타파하고, 심지어 삼일만세 운동을 이끄는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정치와 분리되어야 하는 면이 있지만 국란의 시기에 떨쳐 일어났던 모습은 민족주의와 연결됩니다. 안중근이나 안창호와 같은 민족의 열사들 중에 기독교인이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기독교가 반공의 대명사가 된 과정은 복잡하지만, 부분적으로 서술하면 몇 가지 가능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종교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대표적인 표현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서구 자본주의 사상은 기독교를 배경으로 발전한 면이 있습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그 관련성이 사회학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핵심을 정리하자면, 칼빈의 직업소명설이 "이자놀이"를 하던 고리대금업을 "자본업"으로 인정해 줍니다. 직업소명설에 의해 성직자만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이기에 성실하게 일하도록 이끕니다. 그래서 생산이 증대됩니다. 기독교적 청빈을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은 아껴 쓰고 절약하게 되어 잉여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보관하게 되는데, 불안전하므로 은행업자에게 맡기고 이자를 받게 됩니다. 은행업을 하는 자본가들은 예금한 사람들에게 줄 이자를 마련하기 위한 획기적인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영국의 면화를 직조하는 기술을 발전시켜서 세계적인 공업국가와 금융업 국가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리고 중간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자유방임 자본주의에서, 국가 개입 자본주의로, 그리고 다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계로 변화해 가고 있습니다.
초기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비인간화와 노동력 착취, 다양한 사회적 폭력이 자행되었습니다. 농촌이 붕괴되고, 인권이 무시당하고, 어린이와 여성이 소외되고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이런 자본주의의 병폐를 지적하며 등장한 시대정신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해 준다는 구호를 내세웠고, 공공연히 프롤레타리아(노동자) 혁명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1917년 10월에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게 되고 1922년 공산주의 경제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연합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 시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 1914년붜 1918년까지 이어졌던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 볼셰비키 혁명은 이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이 제2차 세계대전이지만 그 사이에 하나 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대공황"이었습니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경제위기의 시간이었습니다. 호황의 경기를 따라 시설을 늘리고 생산샹을 증가시켰는데, 문제는 소비가 따라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증가하게 되고, 이는 다시 소비위축으로 이어지고 다시 산업시설이 문을 닫고 더 많은 사람이 실업자가 되는 악순환이 생기게 됩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위기는 이어서 유럽으로 넘어가게 되고,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전쟁배상금의 고통과 아울러 경제위축의 위기까지 같이 겪게 되었습니다. 이런 독일인들의 불만을 자기의 지지로 이끌어낸 사람이 히틀러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지난 전쟁에서는 연합군이었던 일본이 이 때에는 독일과 함께 도발국이 되어 세계 정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후에 나누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 사상이 적대적인 관계가 된 것은 이런 몇몇 세계사적인 상황과 해방 이후 일어난 좌우 갈등, 그리고 남북 각각 독자적인 정부 수립, 한국전쟁 등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영락교회로 대표지어질 수 있는 남한으로 피신해 내려온 기독교인들은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한국교회가 반공주의 노선을 걷도록 하는데에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력이 기독교를 표방하며 저질렀던 잘못이라든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노태우 씨 시대에 있었던 한국교회의 친정부적 활동, 그리고 서북청년단의 만행 등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기독운동은 기독교의 본질을 기억하며, 정치적인 입장에 깊이 매몰될 때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을 포함합니다. 칼을 들고 누군가의 귀를 내리쳤던 베드로에게 그것까지도 참으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가르침이 과연 무조건적인 굴종까지 포함하는 것인지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최근에 오르내리는 본 회퍼의 선택은 얼마나 정당하며, 중세후기의 십자군 전쟁은 정당했는지 그리고 호손의 '주홍글자' 등에서 발견되는 근현대 미국 개신교회가 취했던 마녀사냥이라든가 아프리카 원주민을 납치해서 노예로 삼는 일을 옹호해준 기독교 신학 등에 대한 성찰을 겸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운동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