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5일
기독교인에게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에 대한 질문은 학부 1학년에 들어가면서 처음 듣게 된 표현이었다. 신학을 공부한 이후에 “평신도신학”이라는 운동이 반짝하고 한국교회의 유행으로 끝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신학 Theology라는 표현은 Theos(하나님)와 Logos(로고스)의 합성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가장 평범한 개념은 “하나님이 하시는 학문”이라는 것으로, 인간이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의학” 등의 학문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스스로 알아가는 학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논리적인 해석이 가능하지만, 우리는 이 설명을 우리의 “신학”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왜냐하면 지렁이가 인간이 연구한 다양한 “인간학”적 설명을 습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가 다르고, 삶이 다르고... 더 이상 설명이 우스울 정도로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공부를 하시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초월적인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설명은 “생물학”, “생태학”, “로보트공학”, “천문학”, “미학” 등의 특정 대상을 인간이 연구하고, 관찰하여 여러 인과관계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통제하는 학문처럼, “신학”도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에 대해 관찰하고, 연구하여 여러 인과관계를 발견하여 통제하는 학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설명에 의하면 생명이나 우주와 같이 인간이 접근하기 어렵고 신비한 것의 부분을 건드리며 알아가듯이 “하나님”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여, 심지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극단을 만나게 된다. 이 경우 인간은 부분적으로 하나님보다 우월하거나 적어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는 개념이 담길 수도 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신학을 처음 접한 신인생에게 선배들은 “신학”과 “신앙”은 다른 것이라고 가르쳐 주곤 하였다. 나의 경우에, 신학과 신앙은 일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나를 향하여 선배들은 “사고개념이 깨져야 한다”고 핀잔을 주곤 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신학은 “방법론”이라는 것으로 이해된 듯하다. 위에 있는 신학에 대한 두 번째 설명에 대한 타당성을 강조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니체의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신은 죽었다”고 비아냥할 때, 그것은 니체의 신학적 표현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묵상과 독서, 사유의 결과로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신학을 이제 세 번째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학문’이라는 개념에 내재된 핵심 개념들에는 몇 가지가 있다. 진리, 지식, 이해, 이성, 설명, 설득, 깨달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철학에서 “인식론”적인 영역의 것으로 다루어진다. 인식론은 인간이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이 지식인지를 인지하고, 그 지식을 얻거나 전수하기 위한 방법을 어떻게 개방하고 사용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다.
신앙은 이와 다른 측면이 존재하게 된다. 신앙(Faith)은 믿는다(believe/belief)는 신념적 활동과 의지한다(trust)는 기본 개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신앙에도 앎(knowing)이라는 개념과 실천(doing), 순종(obey) 등의 개념도 담겨 있다. 신앙(믿음)은 명사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주로 동사적 설명으로 이해되고 있다. 신앙에서의 앎은 적극적인 신학적인 앎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전수된 것을 받아들이고, 지키고, 실천해야 하는 앎이다. 거기에는 “왜?”라는 질문이 들어가기 매우 어려운 구조적 틈새만 존재한다.
신학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하도록 하겠다.
김동석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