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문 음악가를 제외하고는 클래시컬 음악을 듣는데 어려움을 겪곤 한다. 특히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익숙한듯 하면서도 다양한 연주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듣게 된다. 심지어 제목도 모르고 작곡자도 모르면서 음악의 흐름에 따라가곤 한다. 그래서 늘 듣던 몇 가지 음악만을 반복해서 듣게 되는 편향성이 생기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 연주단이 왜 그렇게 많으며, 국내에도 다양한 시립, 국립 혹은 사설 오케스트라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 것에서 각각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직감적으로 잘한다 혹은 못한다라고 느끼는 것은 연주팀의 수준에 관한 부분이다. 그러나 수준이 높은 연주단에게서 나타나는 차이를 구분하는 것은 과장한다면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원본(오리지널 작곡)을 모르기 때문에 이 곡을 듣게 되면 그게 전부인줄 안다. 사실 원본을 알아도 별차이가 없다.
신앙에 있어서 성서해석이라는 과정이 이런 의미를 포함할 수 있다. 성서해석을 못하는 일반인(?)은 동일한 해석을 반복하는 그저그런 작곡자들과 연주자들 틈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높은 수준의 연주와 동네 팀의 수준을 얼핏 느끼는 정도이지만 심각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의 수준이 높아지지 못하는 경향이 한국교회에 이미 깊이 내재되어 있고, 문제의식 조차 갖지 않고 있다.
심지어 해석능력을 잃은 목회자들과 수많은 사역자들의 무한 복사과정이 수많은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들은 최선을 다해 독주회를 수행하고 있지만, 성경이 독주로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의 책이 아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해석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목적지가 아니다. 오히려 아마추어적인 해석의 기회를 넓어져야 한다. 스포츠도 포함되겠지만, 특별히 음악 혹은 미술과 같은 예술은 우리 내면에서부터 활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부적으로 타고난 영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독자적인 경지에 도달하기 어렵다. 심지어 영재들도 영재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같은 아무추어는 자기만족을 위한 수준의 악기 하나 정도 연주하면 충분하다. 조금 더 실력이 쌓이면 다른 사람에게 연주를 들려주거나, 다른 이들의 노래에 반주를 해주는 정도가 되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마추어 연주자는 진정한 프로 연주자를 만나게 되면 인정하고, 동경하고, 쉽지는 않지만 도전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더구나 그가 원포인트 레슨을 해준다면 그 결과는 나의 노력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 된다. 관심도 없고, 실력도 없는 사람에게 해 주는 원포인트 레슨은 무의미한 시간낭비일 수 있다.
실력은 없더라도 직접 해석하고 연주하는 아마추어가 전문가들의 음악을 듣고 더 감동할 수 있고 존경하기도 하며 비판을 할 수도 있다.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이런 면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동석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