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석 박사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매우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기억은 이집트를 벗어난 후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와 매우 유사한 사건이 있는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페르시아 시대를 거치면서 본토로 돌아오게 된 사건이다. 그들은 탈이집트의 기억과 탈페르시아의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와 해석은 큰 차이를 유발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모세의 지도를 받으며 나아왔을 때에는 영광이 있었지만,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초라한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유다지파의 다윗의 자손 중에서 영광의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구약성경에서는 성취되지 못했다. 오히려 개신교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신구약 중간시대에 레위지파에서 약 100년 간의 왕조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왕이 등장하게 되고 그 예수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0년 간의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는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짚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종교개혁이다. 단일 기독교회(Holy Catholic Church)의 영광이 깨지고 다양한 기독교회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시도되는 기독교 운동은 연합운동(Union 혹은 United)이다. 개혁교회 전통은 한국교회에서도 분열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연합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일부 개신교회들이 다원주의를 반대하기도 하지만, 종교다원주의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기독교 내적인 다원성 그리고 세계화 시대의 문화적 다원성의 상황은 존중되어야 할 대목이다.
이런 개별성과 연합의 문제는 이미 바울 서신 중 고린도전서 12장에도 등장한다.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몸이 여러 가지 지체를 가진 것을 언급하며, 각각의 지체가 독립적이기는 하지만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연합함으로써만 생명력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바울의 강조점 중의 하나는 연약한 지체에게 아름다움을 더하여 주고 이미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라는 것이다(고전 12:23-26).
요즘 유행하는 언어들은 코로나19, 팬데믹, 뉴노멀, 포스트 코로나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언어들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 것인가? 연약한 자들을 위한 기독교적 사명이라는 언어로 변화될 수 있어야 한다. 조선에 개신교가 전파될 때는 국제적 역동 속에서 수많은 거대 국가들이 식민지를 만들던 때였다. 열국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한반도는 프랑스와 미국, 청나라와 러시아가 기회를 보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일본이 우리를 정복하였다. 그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대표적인 인물들은 이 땅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복음과 함께 치료와 교육을 통해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홀로 서기를 하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다가오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아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현재의 기득권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극복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특히 연약한 자를 돕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심이다(렘 9:24). 우리는 이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에 동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