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1987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해에 바로 대학에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합니다. 그러나 내신 성적도 그랬고, 학력고사 성적이 저조해서 전기대학 원서 작성을 놓고 담임선생님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기를 지원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장로회 신학대학교가 후기 대학이었기에, 원래 나는 목회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장신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예년의 장신대 커트라인보다는 그래도 높은 성적이었기에 충분히 합격할 줄 알았는데, 결과는 낙방이었습니다. 나름 충격이었고, 결국 1년 간 재수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선택지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1987년은 우리나라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저는 강원도 춘천에서 부모님과 살고 있었습니다. 동네에 있는 몇 안 되는 재수 학원 중의 하나를 정해서 공부하러 다녔습니다. 학원까지 가려면 강원대학교 후문 근처를 통과해서 팔호광장이라고 부르는 곳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곳은 강원대학교 학생들이 후문에서부터 데모를 진행해서 도착하는 곳이었습니다. 87년의 춘천에서도 종종 데모가 있었습니다. 재수생은 그런 사회적 현상에 무관심한 편이었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최루가스는 진짜 눈물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눈물의 근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재수를 하던 친구와 춘천의 봉의산까지 새벽 달리가를 하곤 했습니다. 매일매일 서로를 깨우며 달리기를 했었는데, 그날은 제가 그 친구네 집에 들렀다가 가는 날이었습니다. 친구네 집은 팔호광장 근처였지요. 친구네 집 앞에 서는 순간 눈물이 펑펑 흘렀습니다. 콧물이 줄줄줄 쉬지 않고 흘렀습니다. 급히 친구네 대문을 두드렸고, 친구 어머니가 나오셔서 저를 맞아 주셨습니다. 당연히 그날 달리기는 포기했습니다.
그 해 6월에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박종철씨 고문치사에 대한 대학생들의 6/10 항쟁 하루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두 명의 희생에 대한 젊은이들의 의분은 하늘을 꿰뚫었고, 곧이어 6월 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결국 노태우씨가 6월 29일에 특별선언을 하게 되어 간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투표에 의한 직선제 선거로 바꾸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철 없는 저는 나이가 안 되어서 선거를 할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말입니다.
다시 학력고사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원래 장로교 목사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기에 아직도 후기 대학으로 되어 있는 장로회 신학대학교에 진학하기에 앞서서 모의고사를 한 번 더 본다는 심정으로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지원하였습니다. 1988년 대입부터 몇 년 정도 '선지원 후시험'이라는 입시제도가 운영되었습니다. 작년 성적이 어떤지 알기에, 그리고 1년 간 열심히 했지만 되겠어라는 심정으로, 단지 모의고사 한 번 더 본다는 취지에서 지원한 학교에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합격한 김에 장신대는 대학원으로 진학하기로 하고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과대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날 매우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후에 교문을 향해 걷는 저의 앞으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순간 눈이 따갑고, 눈물과 콧물이 쉬지 않고 흘렀습니다. 1988년 봄은 그렇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교문까지는 100미터 남짓한 거리였지만 10미터도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아마도 선배인듯)은 태연히 걷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숨을 최대한 참으며 걷는 것입니다. 저는 전봇대 뒤에 숨어서 눈물이 멈춘 후 다시 걷고, 숨고를 반복하며 겨우 교문을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선배들이 신입생 환영회를 해주었습니다. 여기저기 잔디밭에 음료수와 과자를 깔아놓고 와서 앉으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들은 우르르 몰려가서 잔디밭에 털썩 앉았습니다. 그러자 잔디밭에 가라앉아 있었던 최루가스가 솟아올라 선후배 모두 재채기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꼭 감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다른 곳으로 도망치듯 옮겨갔습니다. 1988년의 교정은 최루가스 천지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은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최루가스와 범벅이 되면서 찾아온 것입니다. " 운동권"이라고 불리우던 선배들은 우리를 모아놓고 여러 가지 책을 같이 읽도록 권해 주었고,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민주광장"이라고 부르는 도서관 앞에 나가서 다양한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돌을 던진 적은 없지만, 선배들을 따라서 정문 앞까지 어깨동무를 하고 나아갔습니다. 철교 밑에는 전경들이 하얀 헬멧을 쓰고 청바지 차림으로 있거나 검은 투구와 방패와 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 있는 장갑차에서는 신기전에 나오는 것과 같이 구멍이 숭숭 뚫인 최루탄 발사기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영화 1987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1988년은 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였고,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리는 해였습니다. 8월 15일 즈음에 큰 집회가 있을 예정이었고, 저는 부모님이 계시는 춘천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사건은 먼저 대학교에 진학했던 고향친구로부터 발생했습니다. 그 친구는 학생회 임원이어서 연세대학교에서 진행되는 8/15 행사에 참석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부탁을 했고, 친구와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습니다. 신촌 전철역에서 내려서 굴다리 앞까지 왔는데 전경이 검문을 하려고 했습니다. 저의 학생증을 보여주고 친구와 함께 교문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8월 15일에 전경들에게 잡히고, 서대문 경찰서가 가득 차서 서부 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48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훈방되어 나왔습니다. 그 이틀 동안 보았던 "선봉대"의 모습에 실망하여 학생운동의 한계를 개닫게 되고 저는 "기독운동"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 다짐을 이루는데 거의 30년이 걸렸습니다.
선봉대를 하는 대학교 2학년 학생들의 모습에는 분노와 저주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매우 무식한 것을 보았습니다. 극단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자기의 몸을 바치는 그 모습은 한 편으로는 숭고하지만 반대로 보면 무지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측면, 즉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가상하지만 다른 측면, 청년들의 세속적이고 음란함을 직면하였습니다. 전경들에게 둘러싸여서 투쟁을 준비하는 시간동안 불안에 떨던 사람들은 그 긴장감을 극복하기 위해 연세대 캠퍼스 이곳저곳에 모여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었습니다. 문화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 중에서 노래가 가장 좋은 것이었습니다. "청송대"에서 울려퍼진 노래는 한 편으로는 독재자를 비난하는 가사였고, 그 내용은 매우 성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 남성적 관점의 성적 표현이 난무했습니다. 그런 노래는 군대에서 부르는 군가들에도 담겨 있습니다. "국 쏟고"로 시작되는 군가와 학생들이 불렀던 해학적인 노래는 똑같이 여성에 대한 성폭력적인 가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노래를 부르며 환호하는 것은 군인이나 학생이나 일반이었습니다.
하나가 선하다고 다른 악을 용인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완벽한 선을 이루기 어렵겠지만 모든 선을 추구하는 운동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담론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바로 "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좋다 나쁘다로 구분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크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후 기독교 신앙 활동에 담겨진 반공정신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살펴보는 것과 비교하는 쪽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던 20세기 중반의 아시아에서는 대대적인 학살이 이어졌습니다. 이 부분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북한이 그러했고, 캄보디아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반대말이 민주주의가 아닌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사건들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은 고통을 설명해 주는 핵심적인 키워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이해가 같이 담겨 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이어집니다.